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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만에 보내는 답시 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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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6-06 17:24:19, Hit : 3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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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철
전철을 타면
일류 이류 삼류 지나 끄트머리
지지리 못난 오류동
늘 잘못했다는 오류동에서
아침 학교길 전철을 타면
가끔씩 든든한 사내 가슴 대신
작은 처녀의 가슴을 만난다.
힘든 출근길
이 남자 저 남자 무지막지한 사람들 속에서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사람지옥 속에서
그나마 가슴을 부끄러운 가슴을
가방이나 책으로 가릴 수 있는 처녀들은
그나마 팔에 조금은 버틸 힘이 남은 여자들이다.
오류역 개봉역 꽉꽉 미어져 오는 사람의 밀림
빽빽한 밀실에 갇혀 어쩔 수 없는 전철의 기우뚱거림에
흔들려 부평포 따로 없이 흔들려
여기저기 아악 비명소리
아저씨, 엄마 - 울음소리.
처량하게 울리는 아침 출근길
회사로 학교로 전쟁터로 가는 사람들 속에
내 등에 힘없이 기댄 처녀도 있었다.
한정없이 뛰는 숫총각 가슴이 있었다.
속일 수 없는 내 나이 스물다섯.
1992
하교길
언니들 돈 벌러간 신작로따라
집에 가는 길
먼지에 절은 운동화를 털다
흙먼지 뿌옇게 날리는 차 꽁무니에 돌도 던졌다.
더먹머리 위에선 6월의 태양이 불똥을 싸대고
겨울보리를 베어낸 논마다
흙범벅 아저씨들이 모여 손모를 냈다.
노리미 고개 넘어 멀리 동네 방앗간이 보이면
자꾸만 걸음이 잘 지 자를 닮아갔다.
오늘도 집에 가서 소꼴을 베나 감자를 캐나
뒷막골 넘어 아버지한테 가야 하나 생각하면
테레비속에 도시 아이들이 부럽기만 했다.
상여집 지나 달구지길에 들어서면
아버지 회초리보다 더 무서운 백발귀신에
걸음아 날 살려라 뛰기도 했다.
등뒤에선 떨그럭떨그럭 빈도시락이 따라오고
어디 밀밭이 없나
참외밭은 없나
손톱에 까맣게 오디라도 따 먹을까
냇가 모래벌로 도망쳐
놀다나 갈까
1992
어떤 집안문제
아버지는 아들에게 꾸고 살았다.
할아버지도 아들에게 꾸고 살았고
아버지는 물론 돈을 벌었다.
할아버지도 옛날엔 돈을 벌었고
그래도 그 집안 내력은
자식에게 자식에게 꾸고만 살았다.
할아버지적엔 다섯을 벌고
열을 꾸었고
아버지는 쉰을 벌었지만
꼬박 백은 꾸어다 썼다.
아들은 오백을 벌어오지만 어느새
그 아들몫의 재산을 천이나 빚졌다.
이렇게 그 집안은
대대로 자식에게 빚을 지고 살았지만
그집안 내력엔 한 번도 빚 갚은 일이 없었다.
물론 그 집안
삐까번쩍 으리으리했지만
한 해 한 해 빚더미에 시달리다
파산할 줄 알던 사람 몇이나 있었을까
각주) 이천 년전 우리의 이웃 행성 지구는 공업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한 해 한 해 버린 쓰레기와 파괴된 환경 때문에 인간종은 멸종했고 대부분의 생물들도 더는 살 수 없는 죽음의 사막이 되었습니다.
1992
시론(詩論)
사랑하는 만큼의 시를
피와 살이 박히고 노동이 박힌 시를
동지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적들에게는 한없이 날카로운 시를
이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길 위에 사랑을 쓰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
그들이 흘리는
피같은 땀에 대한 사랑을
그들의 노동위에 되돌아가는
영광아닌
천대와 배고픔에 대한 저주를
그리하여 또한 시는 쟁취하는 것이다.
형제들의 행복한 내일을
착취와 빈곤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을
1992
부끄러운 고백
범민족 대회가 있다고 후배들이 시내에 나가던 날
난 부끄럽게도 학사 안내실 문을 두드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후배들이 시내로 나갈 때 타던 그 차를 타고
소개받은 집을 찾았다
범민족 대회가 있던 날
후배들이 경찰에 쫓겨 거리를 헤맬 때
고속버스터미널 지나 난
몸값을 흥정하러 가고 있었다
1993
아침을 여는 까치
새여
조선의 새여
새벽 둥지를 차고 일어나
부지런한 날개 짓에
아침을 물어오는 새여
누구보다 먼저 일터로 나서는
농사꾼들의 오랜 벗이던 새여
온 동네의 기쁨을 바쁘게 물어오던 새여
아주 오랜 전설 적부터
견우와 직녀의 인연을 이어주던 새여
한 밤
어둠을 저어하는 긴 몸부림으로
보이지 않을 희망
날개 짓에 날개 짓에
피 흘리다 쓰러지는 날개 짓에
피투성이 희망으로 올 새여
시대의 아침을 여는 새여
시대의 시인이여
1993
오비이락(烏飛梨落)
가을은 깊고
낙엽향기 진하니
떠나가는 이들처럼 가벼워지고 싶네
걱정은 끝이네
1993
가을에 나는 보았다
가을에 나는 고통을 보았다.
고통이 소리를 뻑뻑 지르면서
고추처럼 빨갛게 익어가는 것을
고통도, 가을에는 벼처럼 익어서 고개숙인다는 것을
고통도 가을에는 땅에 떨어져
서리 내리기 전에 씨알이 된다는 것을
그리고 긴 겨울을
싸우고 싸워서 이겨낸 놈들만 새봄마다
언땅을 뚫고 나와 따뜻한 햇빛 아래서
생명의 기지개를 켠다는 것을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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