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십년 만에 보내는 답시 5 |
|
2003-06-06 17:15:00, Hit : 3382 |
|
|
 |
|
 |
어떤 날의 기억
한나절 새
남도에서 북도, 북도를 넘어 만주벌까지
얼음만 꽁꽁 얼어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길은
차가운 시베리아
한동안 훈훈했던 날도
우리들의 그날도
악몽 속을 헤매고 있는
일구팔칠 년의 마지막 날
이런 날 푸른 하늘은 겨우 겨우
우리들의 한숨이나 주어 담기에 바쁘다
축 쳐진 어깨 위에 쌀 한 말의 책가방이 얹힌다.
눈앞은 캄캄하다.
어디로 갈까? 눈앞에 금시 전경이 나타나
형의 가면을 쓰고, 곤봉이 춤을 춘다.
무섭다. 죽음이다.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또 눈물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
미련한 몸뚱아리는
최루탄 파편을 피해 달아나는 백 미터 기록 선수가 되고
바보 천치 놀음에 바쁜 머리는
눈물과 공포로 되범벅되어
머저리 사촌쯤이나 되었을까?
1987년 12월 31일
아! 언제
언제까지 이렇게 머물러야 할까
느끼면서도 주저하는
이런 순간들이
머리통만 호박같이 커서
모든 게 되는 것일까?
때려주고 싶다.
호되게 회초리
더 세게 작대기
그러나 힘이 없다.
가야 할 힘이 없다.
그저 그렇게 살아갈 때
적당히 때에 맞춰 살아갈 때
나는, 내 한 목숨은
어둠 속으로 지워지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마저도
나는 꿈속에 있을까?
무엇을 잡고
무슨 지푸라기를 잡고
오늘을 헤쳐 나가야 할까?
1988년 1월
초라해지다
언제까지 뒷전에 서야 하나
나약한 몸을 간직하고
언제까지 언제까지
뒷전에 서서 열중 쉬어 자세로
눈물만 흘려야 하나
약한 몸 하나에
모든 핑계를 붙이기는
남보다 내 자신에게 더 꺼려지는 것을
언제까지 난 비겁의 바구니 속에서
굴러야 하나
혼자서 죽도록 사랑할래도
상상도 할 수 없이 초라해지는 현실 앞에
어떻게 떨쳐 일어나야 하나
1988. 3.22
불효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불효자가 되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허위를 알던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만으로 못 다해
이 땅의 진실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밝혀서 녹색의 땅을 뒤흔들던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불효를 범해야 했다.
1988.3.22.
마지막 혈서
나는 온몸으로
사랑을
배우고 싶다.
1987. 12. 25. 나는 손가락의 상처를 뜯어 난생 처음이자 마지막의 혈서를 썼다.
눈이 내리던 그 새벽에.
※옛날에 쓴 시들을 보니 아픔이 다시 묻어납니다.
이렇게 글로 정리할 수 있는 시들도 있지만
노래로만 불리다가 사라진 시들도 많습니다. 미처 글자로 담지 못한 시들이, 그리고 삶들이.
|
|
|
|
...